팔만쪽장정 - 책 리뷰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은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소년이 온다>

감동그란 2023. 11. 1.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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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례식은 죽은 이를 떠나보내는 작별 인사임과 동시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다시 삶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책 속에 나오는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은 장례식이 되었습니다."는 억지로 생략된 애도의 시간에 떠난이나 남겨진 이나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작별을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 대한 위로의 추도문 같은 이 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장입니다.
 

소년이 온다

 

1. '한강을 뛰어넘는 한강의 소설'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 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님의 여섯 번째 소설, <소년이 온다>의 한줄평 입니다. 맨부커상을 받은 <채식주의자>는 부끄럽지만 고기반찬을 좋아하는 저로썬 이름에서부터 거리감을 느끼게 되어서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독서를 한 번쯤은 취미라고 말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아는 한강작가님을 저 역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소년이 온다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루고 있는 책 입니다. 사실 저는 이런 큰 주제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책이었고 특별할 것 없는 날에 책장을 넘겼습니다.이미 이 날의 아픔을 다룬 책, 영화는 많이 있지만 추천사에 적혀있는 문구처럼 글을 읽어내려갈수록 이것은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 무고한 영혼들의 시선을 따라 들려주는 이야기 

 이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마다 화자가 달라지면서 그 날의 광주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1장 어린 새는 중학생인 소년 '동호'의 이야기를 알 수 없는 서술자가 들려줍니다. 정대의 누나를 찾으러 나간 거리에서 동호는 함께 있던 친구 정대가 군인들의 총을 맞아 죽는 것을 보면서도 혼자 도망을 치게 됩니다. 죄책감을 느끼던 동호는 정대를 찾기 위해 상무관에서 형과 누나들과 시체를 수습하는 일을 돕습니다.
 
2장 검은 숨은 총을 맞고 죽은 정대가 혼이 되어 겹겹이 포개져 있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서술을 시작합니다. 3장 일곱개의 뺨은 1장에서 동호와 함께 시체를 수습했던 은숙이 민주화운동에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4장 쇠와 피는 계엄군과 싸우기 위해 동호와 도청에 남아있다가 수감된 '진수'와 한 남자의 시점에서 전개됩니다. 5장 밤의 눈동자는 민주화 운동 때의 성고문이 트라우마로 남아 아직도 그 시간에 머물러 있던 선주의 이야기로 아픔을 극복하고 이겨내고자 하는 실낱의 의지를 보여주며 마무리됩니다.
 
6장 꽃핀 쪽으로는 동호 어머니의 시점으로 어릴 적 죽은 동호를 도청에서 그대로 데리고 나오지 못해 날마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동호를 그리워합니다.
 

3. 당신을 구합니다.

고통이 느껴지는 가슴뼈 가운데 오목한 곳을 주먹으로 눌렀다. 지금 정미 누나가 갑자기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달려나가 무릎을 꿇을 텐데. 같이 도청 앞으로 가서 정대를 찾자고 할 텐데. 그러고도 네가 친구냐.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야. 정미 누나가 너를 때리는 대로 얻어맞을텐데. 얻어맞으면서 용서를 빌 텐데.
p.36

 
 흔히 용서를 구한다는 표현을 씁니다. 구한다 라는 뜻은 필요한 것을 찾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화자들의 특징은 살아남은 이들이 떠난이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용서'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정작 용서를 구해야 하는 사람은 찾지 않고 죄 없는 사람들만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p.99

 
 작별을 고할 시간조차 뺏어가서 삶을 장례식으로 만든 죄를 지은 사람이 있습니다. 용서를 구해야 하는 사람의 사죄는 '그'의 마지막 까지도 없었습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사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p.135
아니, 언니를 만나 할 말은 하나뿐이야.
허락된다면.
부디 허락된다면.

...

죽지마.
죽지 말아요
p.177

 소설속에서 남겨진 이들은 죄책감으로 인해 죽음을 선택하기도 하고, 매일이 장례식이 되어 죽음과 가장 가까운 삶을 보내게 됩니다. 그들이 떠나보냈던 무수한 소년들이 그들에게 온다면 반드시 해주고 싶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떠난 이에게 용서를 구하며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자신과 매일을 싸우고 있을 그들에게 "죽지 마, 죽지 말아요"라는 말로 그들을 구해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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